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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향기

사람의 눈을 닮은 액체렌즈에 찍혀볼까?



그는 ‘20세기의 눈’이다. 또 그는 ‘사진의 톨스토이’다. 이것은 모두 지난 2004년 여름 세상을 떠난 전설적인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을 추앙하는 말이다. 하지만 전설은 전설일 뿐. 명성을 듣고 그의 사진을 처음 본 사람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너무 평범하기 때문이다. 그는 광각렌즈나 망원렌즈는 사용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트리밍도 하지 않고 플래시도 쓰지 않았다. 이런 장치를 사용하면 우리가 보는 실제 모습과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표준 렌즈만 사용해 평범함 속에서 결정적 순간을 포착했다. 그리하여 그는 사진미학의 거장이 되었다. ‘카메라로 사진 찍기’가 호사로운 취미이거나 유원지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직업으로 한 몫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전국민의 4분의 1이 주머니에 카메라를 넣고 다닌다. 그리고 찍는다. 왜? 간단하다. ‘내가 목격한 것을 내가 보는 눈으로 담기 위해서’다. 이때 눈과 카메라는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카메라는 눈의 연장”이라는 카르티에-브레송의 말은 철학이 되고 과학이 된다. 



중학교 2학년 2학기 과학 교과서에는 카메라와 눈을 비교하는 내용이 나온다. 셔터는 눈꺼풀, 렌즈는 수정체, 빛의 양을 조절하는 조리개는 홍체, 어둠상자는 맥락막 그리고 필름은 망막의 역할을 한다는 게 그 내용이다. 알고 보면 간단한 내용으로 눈과 카메라를 비교하다 보면 어느덧 우리는 카메라라는 기계를 눈이라는 생명체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히 다른 부분이 있다. 바로 렌즈다. 렌즈는 수정체와는 많이 달라 보인다. 



우리가 가까운 곳을 볼 때는 수정체 끝부분을 잡고 있는 근육(모양체)이 수정체를 밀어서 두껍게 만들고, 반대로 먼 곳을 볼 때는 근육이 잡아당겨져서 수정체가 얇아진다. 이렇듯 생명이 선택한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렇지 못하다. 카메라의 모듈 속에는 굴절률이 각기 다른 오목하고 볼록한 렌즈가 여러 장 겹쳐 있고 그 렌즈 사이의 거리를 기계장치로 변화시켜서 초점을 맞춘다. 렌즈가 여러 장 필요하기 때문에 가격도 비싸고, 빛의 투과율도 떨어지며 무엇보다도 모듈의 크기를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자연을 최대한 닮으려고 하는 현대 과학은 마침내 사람의 눈을 닮은 렌즈를 만들어 냈다. ‘액체 초점 렌즈(fluid focus lens)’가 바로 그것.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에 있는 필립스 연구소가 개발하여 2004년 세빗(CeBit, 매년 4월 독일 하노버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정보통신 박람회)에서 공개한 이 렌즈는 전세계 카메라 기술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액체 초점 렌즈는 지름 3㎜, 길이 2.2㎜의 투명한 튜브 안에 물과 기름이 들어 있는 형태다. 물은 전기를 통하지만 기름은 전기를 통하지 않는 성질을 이용한다. 이 액체 초점 렌즈에서는 물과 기름의 경계면, 즉 물방울이 수정체의 역할을 하고 전기장의 변화가 모양체의 역할을 한다. 물에 거는 전압을 올리면 렌즈의 두께가 줄어들고, 전압을 낮추면 두께가 늘어난다. 두께뿐만 아니라 물방울의 표면 모양도 볼록, 평면, 오목 렌즈처럼 다른 모양으로 바뀐다. 즉, 초점거리가 맘대로 바뀌는 다초점 렌즈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액체 초점 렌즈는 여러 장의 렌즈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싼 값으로 만들 수 있다. 또 전기 소모도 거의 없어서 배터리 크기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액체 초점 렌즈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작게 만들 수 있다는 것. 따라서 디지털 카메라나 카메라폰과 같은 모바일 제품뿐만 아니라 내시경과 같은 의학용 기구에도 획기적인 발전이 기대된다. 액체 초점 렌즈 기술은 우리나라에서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고 특허 출원도 많이 한 상태로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단계다. 



지난 여름, 우리는 예술의 전당(서울 양재동)에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대표작인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도 그 자리에 있었다. 온갖 첨단 장비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고 포토샵 작업을 능숙하게 할 수 있어야 전문 사진작가로 인정받는 현 풍토와는 달리 그는 소형 카메라만 사용했다. 우리 눈과 가장 비슷한 장비로 ‘결정적 순간’을 담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대에 액체 초점 렌즈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액체 초점 렌즈는 우리에게 더 큰 기회를 줄 것인가? 사람의 눈을 닮은 렌즈가 있으니 더 인간적인 장면을 담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결정적 순간’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글 : 이정모 -과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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