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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참상 6.25 전쟁의 참상 ▲ 1950. 9. 30. 전화(戰禍)로 폐허가 된 대전역 ▲ 1950. 11. 24. 불타버린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 1950. 10. 7. 불타고 있는 김포 비행장 ▲ 1950. 10. 18. 전화에 그을린 중앙청 ▲ 1950. 10. 18.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멀리 북악산과 중앙청 돔이 보인다. ▲ 1950. 9. 20. 왜관, 낙동강 철교 복구 공사. ▲ 1950. 10. 12. 미조리호 군함에서 청진항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다. ▲ 1950. 10. 20. 400여 명의 낙하산 부대가 평양부근에 투하되고 있다. ▲ 1950. 12. 18. 북한군에게 뿌린 귀순 권유 전단. ▲ 1950. 11. 2. 적십자사에서 피난민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있다. ▲ .. 더보기
6.25에 북쪽에 남아있기를 원했던 미군 포로들 1953년 휴전협정 당시 북한과 중국은 포로는 무조건 다 돌려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유엔에서는 포로들 중에서 조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포로들은 남을수 있다는 주장이 서로 팽배했었으나 결국 유엔안으로 결정 되었다. 돌아가지 않고 남아있기를 원하는 포로들은 90일동안 중립지대에서 생활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고 마지막으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합의하였다. 북으로 돌아간 포로는 북한군 70,183명 그리고 중공군 5,640명 합계 75,823명이었다. 남쪽으로 돌아온 포로는 한국군 7,862명, 미군 3,597명, 영국군 946명 합계 12,773명 이었다. 북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포로는 22,000명 거의 다가 인민군이었다. 남쪽으로 돌아 오기를 거부한 포로는 한국군이 327명, 미군이 2.. 더보기
그옛날 그시절의 피서 그옛날 그시절의 피서 여치집 파는 행상 / 1963. 06. 01 한강 뚝섬 피서 인파 / 1966. 07. 01 입안이 얼얼한 팥빙수 / 1966 시골의 여름 / 1966. 08. 18 한강물과 함께 출렁이는 광나루의 인파. / 1967. 07. 29 폭염으로 얼음이 귀했던 1967년 여름 해운대 피서 인파 / 1970. 08. 10 인천 송도해수욕장 / 1971. 08. 08 난간에 매달려 가는 승객들로 인해 위험스런 만원인 교외선. / 1972. 06. 11 피서인파 150만 - 구식증기기관차까지 동원된 임시열차도 초만원. 위험을 무릅쓰고 열차위까지 몰려 타고 있는 피서인파. / 1972. 07. 23 한강 뚝섬 물놀이 인파 / 1964. 08. 01 만원 교외선의 행락객들 / 1972. 08. 0..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