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의 기이편에 나오는 기록이다. 신라의 제 31대 신문대왕은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안에 감은사라는 절을 세웠다. 하루는 동해에 작은 산 하나가 떠서 감은사를 향해 떠 내려왔다. 그 산에는 대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닌가! 왕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임금의 공복(公服)에 두르던 옥으로 장식한 띠-를 받들어 왕에게 바쳤다. 왕이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합해지기도 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용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비유해 말씀 드리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만 소리가 나게 되므로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며 오색 비단과 금과 옥을 용에게 주고, 대나무를 베어 바다에서 나왔다. 그 때 산과 용은 문득 없어지더니 보이지 않았다. 왕은 궁으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는데,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나았으며, 가물 때에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개이고 바람이 가라앉았으며, 거친 파도는 평온해졌다. 왕은 그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고 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옛 기록에는 이밖에도 용에 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문무대왕은 죽어서 나라를 지키는 동해의 용이 되었으며, 처용가로 잘 알려진 처용은 동해 용왕의 일곱 아들 중 하나이다. 수로부인이 용에게 납치되었을 때 백성들은 ‘해가(海歌)’라는 노래를 함께 불러 수로부인을 구해 냈다.
용에 관한 기록이 이처럼 많은 것은 우리나라가 오래 전부터 농경 문화권에 속해 왔다는 사실과 관계가 깊다. 용은 바다나 강, 연못, 늪 같은 물 속에 살며 비와 바람 같은 여러 가지 기상 현상을 관장한다는 신격화된 상상의 동물이다. 한 해의 풍흉이 기상 조건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니 비와 구름을 관장하는 주체로서 용 신앙이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상상의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신라 이래 20여 차례나 된다고 한다.
이 같은 용의 출현에 관한 기록들은 신화나 전설처럼 그저 신비스럽게 꾸며진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은 용의 발생설 중 하나인 ‘용권설(龍券說)’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용권이란 바다에서 일어나는 회오리바람을 말한다. 그 모습이 승천하는 용과 같다고 해서 ‘용오름’이라고도 불리는 용권은 적란운에 의해 나타난다. 높이 십여 킬로미터의 거대한 탑처럼 보이는 구름인 적란운 속에서는 잠열(숨은열)에 의해 데워진 공기 때문에 강한 상승 기류가 일어난다. 이 때 적란운의 하층부에는 주변의 습한 공기를 빨아들이며 급격하게 소용돌이치는 용오름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용오름 현상을 신격화하여 용을 상상하게 되었다는 것이 용권설의 요체이다.
천 년 전, 신라 사람들은 동해에서 솟구쳐 오르는 용오름을 호국용으로 다시 태어난 문무대왕이라고 생각했다. 작년 10월 3일, 동해의 울릉도에서 용오름이 관측되었다. 높이 600미터, 지름 3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용오름은 신령스런 몸을 뒤틀며 남동쪽으로 200미터를 이동한 뒤 사라졌다. 다사다난했던 2003년이 지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아, 온갖 세파를 잠재울 만파식적의 은은한 소리가 다시 들리기를 기대해 본다.(정창훈/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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